서로마 멸망의 구조적 원인
1. 서론: ’붕괴’의 재해석 - 야만족의 침입은 결과였는가, 원인이었는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논할 때, 통상적으로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사건을 그 종점으로 삼는다.1 이러한 관점은 고트족을 위시한 ’야만족’의 침입과 압력이 거대 제국을 무너뜨린 외부적 요인이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3 그러나 이러한 사건 중심의 해석은 수세기에 걸쳐 제국을 내부로부터 좀먹어 온 구조적 병폐를 간과하게 만드는 한계를 지닌다. 역사학자 윌 듀랜트가 통찰했듯, “위대한 문명은 내부에서 스스로 멸망할 때까지는 외부로부터 정복되지 않는다”.1 이 말은 서로마의 멸망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를 제공한다.
현대 역사학계는 로마의 멸망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지닌 편협함을 지적하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원인들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5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게르만족의 침입은 멸망의 근본 원인이기보다는, 이미 치명적으로 약화된 제국이 드러낸 마지막 증상이자 붕괴를 가속화한 계기(trigger)에 가깝다.6 476년이라는 특정 시점은 후대 역사가들이 편의상 설정한 기점일 뿐, 당시 사람들에게는 제국의 갑작스러운 종말로 인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5 실제로 ’후기 고대(Late Antiquity)’라는 시대 구분은 정치적 붕괴를 넘어선 사회·문화적 연속성을 강조하며, ’멸망(Fall)’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재고하게 한다.3
따라서 본 보고서는 ’서로마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단선적인 질문에서 벗어나, ’서로마는 어떻게 붕괴에 이르게 되었는가?’라는 과정 중심의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보고서는 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세 가지 핵심적인 내적 요인—자영농의 붕괴, 재정 시스템의 파탄, 그리고 군사력의 질적 저하—이 어떻게 서로를 악화시키는 거대한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자영농의 몰락은 로마군의 인력 기반을 붕괴시켰고, 병력 부족은 통제 불가능한 용병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용병 유지를 위한 막대한 재정 부담은 다시금 남은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이어져 이들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구조적 모순이 어떻게 제국의 회복탄력성을 잠식하고 결국 외부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는지, 그 장구한 붕괴의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본 보고서의 핵심 목표다.
2. 공화국의 주춧돌이 무너지다 - 자영농의 붕괴와 라티푼디움
2.1 로마의 힘, 아시두이(Assidui)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의 패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독특한 군사 및 사회 구조에 있었다. 공화정 초기 로마의 힘은 토지를 소유한 시민, 즉 자영농(Assidui)으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 군단에서 나왔다. 이들은 단순한 농민이 아니라, 국가의 생산을 책임지는 경제의 중추이자, 시민의 의무로서 전장에 나서는 군대의 핵심이었다.7 자신의 재산으로 직접 무장을 갖추고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이들 자영농 계층은 로마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었다.8 이들의 존재는 로마 사회에 강한 공동체 의식과 애국심을 불어넣었고, 이는 로마 군단이 지닌 높은 규율과 사기의 원천이 되었다.
2.2 승리의 역설, 포에니 전쟁의 상흔
그러나 로마의 성공적인 팽창은 역설적으로 그 성공의 기반을 허무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기원전 3세기에 벌어진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자영농 계층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7 한니발이 이끈 카르타고 군대가 14년 이상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하면서 농지는 황폐화되었고, 수많은 농가가 파괴되었다.9 전쟁이 이탈리아 본토를 넘어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등 지중해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자영농들은 수년간 고향을 떠나 군인으로 복무해야 했다. 이는 농지의 경작 포기를 의미했고, 가계의 경제적 파탄으로 직결되었다.7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명 손실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니발 전쟁 기간에만 약 30만 명의 로마 시민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7 이는 당시 로마 시민 수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로, 농촌 사회의 노동력과 병력 자원을 뿌리째 뒤흔드는 인구학적 재앙이었다.9 전쟁에서 살아남아 돌아온다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방치된 농지는 황폐해졌고, 많은 이들이 빚더미에 올라 결국 토지를 헐값에 팔고 도시의 무산계급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로마의 팽창을 이끈 장기적인 해외 원정은 그 주역이었던 자영농 계층을 체계적으로 붕괴시키는 자기 파괴적인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로마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의 대가로 사회의 주춧돌을 잃어가고 있었다.
2.3 라티푼디움의 등장과 시장 지배
자영농이 몰락한 자리는 새로운 형태의 농업 경영 방식이 빠르게 차지했다.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귀족과 원로원 의원들은 몰락한 자영농의 토지와 국가 소유의 공유지를 헐값에 사들였다. 그리고 정복 전쟁을 통해 대량으로 유입된 값싼 노예 노동력을 투입하여 거대한 규모의 상업적 농장, 즉 ’라티푼디움(Latifundium)’을 경영하기 시작했다.8
라티푼디움은 포도, 올리브와 같은 고수익 환금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했으며, 노예 노동에 기반했기에 생산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11 여기서 생산된 저렴한 농산물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가족 노동력에 의존하던 소규모 자영농들은 도저히 가격 경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8 이는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도태가 아니었다. 한쪽은 국가를 위해 장기간 복무하느라 농지를 비워야 했던 반면, 다른 한쪽은 그 전쟁의 결과물인 노예와 토지를 이용해 부를 독점하는 구조적 불평등의 산물이었다. 결국 자영농의 붕괴는 가속화되었고, 부는 소수의 귀족 계층에게 극단적으로 집중되었다. 이로써 로마 사회는 건실한 중산층이 사라지고 소수의 대지주와 다수의 무산자로 양극화되는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2.4 실패한 개혁과 예고된 파국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하려 했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133년, 호민관으로 선출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공유지를 몰수하여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농지개혁법안을 제출했다.7 이는 붕괴하는 자영농을 재건하여 로마 사회의 안정을 되찾고 군사력의 기반을 회복하려는 합리적인 처방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원로원 귀족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개혁을 방해했고, 결국 폭력을 동원하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살해했다.7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역시 기득권층의 공격을 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13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와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로마 공화정이 당면한 핵심 문제를 명확히 진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 엘리트 계층이 체제의 장기적 안정보다 자신들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폭력까지 불사하며 개혁을 거부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점을 계기로 로마 사회는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회복 불능점(Point of No Return)’을 통과했다. 부의 양극화와 사회 갈등은 더 이상 제어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달았고, 이는 결국 공화정의 근간을 뒤흔드는 내전의 시대로 이어지며 훗날 제국의 붕괴를 예고하는 서막이 되었다.
3. 제국의 혈맥이 막히다 - 재정 파탄과 경제 시스템의 마비
3.1 멈춰버린 성장 엔진
로마 제국의 번영,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끊임없는 영토 팽창을 통해 유지되었다. 정복 전쟁은 새로운 속주, 막대한 양의 전리품,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산 자원이었던 노예를 제국에 공급하는 핵심적인 경제 동력이었다.10 그러나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를 정점으로 제국의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고 국경선이 고정되면서, 외부로부터의 부의 유입이라는 성장 엔진이 멈춰 섰다.10 이는 로마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과거처럼 외부 자원을 약탈하여 내부의 부를 창출하는 ‘팽창-약탈 경제’ 모델에서, 내부의 생산성을 높여 부를 창출하는 ‘지속가능 경제’ 모델로 전환해야만 했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층은 기술 혁신이나 생산 구조 개혁과 같은 어려운 길 대신, 기존의 생산 기반인 속주민과 농민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하는 손쉬운 길을 택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재정 문제를 봉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의 생산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경제적 자살 행위였다.
3.2 ’3세기의 위기’와 인구 쇼크
팽창 동력을 상실한 제국에 3세기는 전례 없는 위기의 시대였다. 50년 동안 20명이 넘는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 황제 시대’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국경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게르만 부족의 침입이 격화되었다.15 그러나 제국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 바로 전염병이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알려진 대규모 전염병이 제국 전역을 휩쓸면서 인구는 최대 3분의 1까지 급감한 것으로 추정된다.1
이러한 인구 쇼크는 로마 사회경제 시스템에 연쇄적인 붕괴를 초래했다. 노동력 부족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고, 이는 식량 부족과 기근을 심화시켰다.9 군대를 구성할 병력 자원과 세금을 납부할 납세 인구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다.16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는 ’고대 후기 소빙하기’라 불리는 기후 변화가 시작된 때와 맞물려, 농업 생산성은 더욱 악화되었다.1 전염병과 기후 변화라는 이중의 타격은 제국의 회복력을 완전히 고갈시켰고, 사회 기반 시설은 무너졌으며, 농촌 공동체는 파괴되었다.1
3.3 세금이라는 이름의 약탈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3세기의 위기’로 인한 세수 급감에 직면한 후기 로마 황제들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세 제도 자체를 파괴적인 수탈 시스템으로 변질시켰다. 그 시작은 212년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누스 칙령’이었다. 이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평등을 확대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목적은 안정적인 세원이었던 속주세를 폐지하는 대신 모든 시민에게 상속세와 노예해방세 등 로마 시민에게만 부과되던 세금을 확대 징수하려는 것이었다.18 이로 인해 발생한 재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각종 특별세가 남발되면서 조세 시스템은 혼란에 빠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면 조세 제도는 더욱 가혹해졌다. 그는 제국의 재정 필요에 따라 황제가 매년 총 세액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이를 각 지역에 할당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흉년이나 질병과 같은 납세자의 개인적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세금을 무조건 징수하는 약탈적인 제도였다.19 세금은 더 이상 국가 운영을 위한 합리적인 부담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하고 파괴적인 재앙이 되었다. 세금 징수원들은 정부가 후원하는 갈취범과 다름없었고, 이들의 부패와 폭력은 납세자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20
3.4 악순환의 굴레
견딜 수 없는 세금 부담에 직면한 농민들의 선택은 명확했다. 그들은 경작을 포기하고 정든 땅을 버린 채 도망치거나, 세금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18 이는 제국의 세수 기반이 스스로 붕괴하는 치명적인 악순환을 낳았다. 납세자가 줄어들수록, 남은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세금 부담은 더욱 커졌고, 이는 더 많은 농민의 이탈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중앙 정부의 과도한 수탈이 역설적으로 지방 분권화를 촉진했다는 점이다.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세금 징수원들의 약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토지를 지역의 유력한 대지주에게 바치고, 그들의 보호 아래 소작농(colonus)이 되는 길을 택했다. 이는 국가에 소속된 자유 시민이 사적인 보호-예속 관계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며, 훗날 중세 유럽 장원제의 기원이 되는 현상이었다.21 즉,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혹한 세금 징수가 오히려 제국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해체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제국의 혈맥은 세금이라는 이름의 혈전으로 막혀버렸고, 경제 시스템은 회복 불가능한 마비 상태에 빠져들었다.
4. 로마의 검이 무뎌지다 - 군단의 ’야만화’와 군사력의 질적 저하
4.1 시민군의 종말
로마 군단의 힘은 그 구성원에서 비롯되었다. 1장에서 상세히 분석했듯이, 공화정을 지탱한 것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무기를 들었던 시민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 지속된 자영농 계층의 붕괴는 로마 군단의 인적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졌음을 의미했다.8 토지를 잃고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프롤레타리아(proletarii)들은 더 이상 스스로 무장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고, 국가에 봉사해야 할 동기도 상실했다. 제국 후기에 이르면 인구 감소까지 겹쳐 시민 중에서 병사를 충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16 로마 시민들은 점차 병역을 기피하는 현상이 만연했고, 귀족들은 대리인을 고용해 병역 의무를 회피했다.22 로마의 검을 휘두를 로마인이 사라지고 있었다.
4.2 용병이라는 필요악
심각한 병력 부족에 직면한 로마 제국은 생존을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제국은 군대의 문을 활짝 열고, 제국 내의 속주민은 물론 국경 너머의 이민족, 소위 ’야만족’이라 불리던 게르만족과 고트족 등을 대규모로 군대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22 이들은 로마와 동맹 조약을 맺고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병력을 제공하는 ‘포에데라티(Foederati)’ 형태로 복무하거나, 아예 로마군에 직접 고용된 용병으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이것이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 효율적인 해결책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제국의 안보를 외부 세력의 손에 맡기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로마 군대의 ’야만화(Barbarization)’는 단순히 군대의 인종 구성이 변했다는 의미를 넘어, 로마 사회가 더 이상 자국민으로 국방을 책임질 사회경제적 역량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지표였다.
4.3 충성심의 변질
용병에 대한 의존은 로마 군대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화정의 시민 병사가 ’로마 원로원과 인민(SPQR)’이라는 추상적인 국가 공동체에 충성을 바쳤던 것과 달리, 이민족 용병들의 충성은 매우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대상에게 향했다. 그들은 로마라는 이념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직접 급료와 전리품, 토지를 약속하는 지휘관 개인에게 충성을 다했다.23
이러한 충성심의 변질은 군대의 사병화(私兵化)를 극단적으로 심화시켰다. 유력한 장군들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황제의 권위에 도전했고, 이는 ’군인 황제 시대’와 같은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을 낳았다.15 군대는 더 이상 국가를 방위하는 조직이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사적인 무력 집단으로 전락했다. 황제들은 끊임없이 군대의 환심을 사야 했고, 이는 군인들에 대한 과도한 보상과 특혜로 이어져 제국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4.4 재정적 수렁과 통제 불능
야만족 용병을 유지하는 비용은 고갈된 제국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22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제국이 재정난으로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거나 약속한 보상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들 용병은 언제든 충실한 군인에서 무자비한 약탈자로 돌변하여 제국을 위협했다.1 410년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한 사건이나, 476년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킨 사건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외부의 침략자가 아니라, 로마가 고용한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결국 로마는 국방이라는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외부 세력에게 ’아웃소싱’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상실하는 길을 걸었다. 군사력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이 게르만 부족장 출신의 장군들에게 넘어가면서, 로마 황제와 중앙 정부는 실권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로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용한 바로 그 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결말에 도달한 것이다.
4.4.1 표 1: 로마 군대의 시대별 비교
| 구분 | 공화정 중기 시민군 | 제국 후기 군대 |
|---|---|---|
| 주요 구성원 | 토지를 소유한 로마 시민(자영농) | 속주민, 게르만족 등 이민족 용병(포에데라티) |
| 복무 동기 | 시민의 의무, 국가에 대한 충성, 재산 보호 | 급료, 토지 분배 등 물질적 보상 |
| 장비 | 개인 부담 원칙 (재산 정도에 따라) | 국가 지급 (장비의 질 저하 및 획일화) |
| 충성 대상 | 로마 원로원과 인민(SPQR) | 황제, 그리고 자신을 직접 고용한 장군 |
| 장점 | 높은 충성심과 규율, 강력한 동기 부여 | 다양한 병종 운용, 즉각적인 병력 충원 가능 |
| 단점 | 장기 복무 시 농지 황폐화, 인력 충원 한계 | 막대한 재정 부담, 낮은 충성심, 잦은 반란과 정치 개입 |
5. 결론: 예고된 붕괴 - 내부로부터 침식된 거인의 최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476년이라는 특정 시점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화정 시기부터 누적된 구조적 모순이 수세기에 걸쳐 제국의 근간을 서서히 침식해 온,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본 보고서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로마의 힘의 원천이었던 자영농 계층의 붕괴는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기반을 동시에 허물었다. 이를 대체한 라티푼디움은 부의 극단적인 편중을 낳아 사회를 분열시켰다. 팽창이 멈춘 제국은 지속가능한 경제 모델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고, 전염병과 기후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가혹한 조세 제도는 생산 기반 자체를 파괴하며 제국의 혈맥을 막아버렸다. 마지막으로, 시민군의 소멸은 충성심도 통제력도 없는 야만족 용병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켰고, 이는 로마가 자신의 방위를 위해 고용한 군대에 의해 스스로의 주권을 상실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1
이 세 가지 요인은 개별적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악화시키는 거대한 음성 피드백 루프를 형성했다. 자영농의 몰락은 병력 부족을, 병력 부족은 용병 고용을, 용병 고용은 재정 압박을, 재정 압박은 다시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낳아 그들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제국은 더 이상 어떠한 외부 충격도 견뎌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관점에서 훈족의 서진으로 촉발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붕괴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이미 내부적으로 속부터 썩어 문드러진 거인을 쓰러뜨린 마지막 바람에 불과했다.4
역사가 피터 헤더 등은 게르만족의 압력이 로마의 과도하게 팽창된 시스템을 무너뜨린 직접적 요인이라고 강조하지만, 그의 주장 역시 로마가 왜 그 압력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거나 흡수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26 그 답은 바로 제국의 내적 취약성에 있다. 사회학자 조지프 테인터의 이론을 빌리자면, 로마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료제, 조세, 군사 시스템을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복잡성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그로 인해 얻는 이익을 초과하기 시작했다.28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시스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에서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자, 연쇄적인 붕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결국 로마의 붕괴가 현대에 던지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성공의 함정’과 자기개혁의 중요성에 있다. 로마의 군사적 성공은 자영농을 파괴했고, 영토 확장은 방어 불가능한 국경과 감당할 수 없는 재정 부담을 낳았다. 로마는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매몰되어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좌절에서 명백히 드러났듯, 기득권층은 체제의 장기적 생존에 필수적인 개혁을 자신들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거부했다.7 로마는 외부의 적이 강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내부의 모순을 직시하고 해결할 정치적, 사회적 용기와 역량을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거대 문명과 조직에 적용될 수 있는 통렬한 역사적 교훈이다.
6. 참고 자료
- 로마제국 부흥과 멸망⑤…분열과 몰락 - 아틀라스뉴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24
- 서로마 제국의 멸망 (476년): 고대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 🏛️ - 재능넷, https://www.jaenung.net/tree/3707
- 서로마 제국의 몰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A%B0%EB%9D%BD
- ko.wikipedia.org, https://ko.wikipedia.org/wiki/%EA%B2%8C%EB%A5%B4%EB%A7%8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text=%EA%B2%8C%EB%A5%B4%EB%A7%8C%EC%A1%B1%EC%9D%98%20%EB%8C%80%EC%9D%B4%EB%8F%99%EC%9D%80%20%EC%84%9C%EA%B8%B0,%EC%9C%BC%EB%A1%9C%20%EC%B9%A8%EC%9E%85%ED%95%9C%20%EB%95%8C%EC%9D%B4%EB%8B%A4.
- 로마가 멸망한 이유 - 고대사 게시판 - 주철민의 역사공부방 - Daum 카페, https://cafe.daum.net/joucheol/587D/1156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서로마제국의 소멸/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 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editOpinion/opinion/history-hyj/2023/09/20/20230920026002
-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4] 로마의 소주성은 이 언덕에서 무너졌다 -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25/2019072500334.html
-
- 중소기업과 로마의 몰락 (15.6.2) > 농부칼럼 | 학사농장, http://www.62farm.co.kr/bbs/board.php?bo_table=c601&wr_id=79
- 전쟁과 제국주의가 로마 국내 정세에 끼친 영향 - 이탈리아의 모든 것, https://tuttitalia.tistory.com/228
- 초인플레가 부른 로마제국 몰락의 교훈 - 주간조선,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42
- 라티푼디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D%8B%B0%ED%91%BC%EB%94%94%EC%9B%80
- 라티푼디움, https://edu.dokdok.co/post-def/1679441655147x798630826191618000
- [역사속 경제리뷰] 로마의 라티푼디움 그리고 봉건국가 탄생, 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245
- 로마제국 부흥과 멸망②…건국과 왕정기 - 아틀라스뉴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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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출산으로 국가소멸? 스파르타와 로마제국이 알려주는 것[딥다이브 …,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31205/122488879/1
- 기세 등등했던 로마가 몰락한 진짜 이유 > 정치∙사회 - 자카르타경제신문, https://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economy&wr_id=7300&page=873
- 로마시대도 맹자도 ‘적정세율은 10%’ - Daum, https://v.daum.net/v/20210208090214041
- [안규태 칼럼] 로마제국과 세금 - 뉴욕 한국일보, http://ny.koreatimes.com/article/20151110/952142
- 로마의 세금이 3-5%밖에 안 됐는데, 왜 세금 내는 사람들이 문제 삼았을까? : r/AskHistory, https://www.reddit.com/r/AskHistory/comments/17v0ipf/if_the_roman_tax_rate_was_only_35_why_did_the/?tl=ko
-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유럽은 왜 발전을 못하게 됐을까? : r/history - Reddit, https://www.reddit.com/r/history/comments/pmtkb7/why_did_europe_fall_back_in_terms_of_progress/?tl=ko
- 로마제국쇠망사 2권 17장 Part 5 - 책소방 티스토리, https://mentobf.tistory.com/119
- 서로마 제국이 로마 군대에 야만족을 고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것은 결국 서기 476년에 멸망과 붕괴로 이어졌지만, 비잔틴 제국이 군대에 야만족과 다른 부족을 고용했을 때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 r/history - Reddit, https://www.reddit.com/r/history/comments/8slu9c/when_the_western_roman_empire_decided_to_hire/?tl=ko
- 서로마 제국 멸망에 관한 최고의 책들 : r/ancientrome - Reddit, https://www.reddit.com/r/ancientrome/comments/toramg/best_books_on_the_fall_of_the_western_roman_empire/?tl=ko
- [중세교회사] 4 게르만족의 대이동, 왜 일어났는가?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u23iZrwpNSo
- 제국은 왜 무너지는가 : 로마, 미국 그리고 새로운 세계 질서 | 피터 헤더 …, https://m.trevari.co.kr/product/7212644425455366144
- 로마제국 부흥과 멸망⑥…유산과 교훈 - 아틀라스뉴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54
- [알라딘서재]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두 가지 시선, http://blog1.aladin.co.kr/739070192/popup/12886956